과학자와 피아노 #24 그 스승에 그 제자, 박사 과정을 2년에 마쳤다고? : Story - 이야기의 숲 (2024)

과학자와 피아노 #24 그 스승에 그 제자, 박사 과정을 2년에 마쳤다고? : Story - 이야기의 숲 (1)

생전에 한국엔 절대로 방문하지 못할 피아니스트라면, 유럽까지 날아가서도 얼마든지 연주회를 직접 듣고 올 수 있는 세상이고, 실제로 딱 그 연주회만을 위해서 (혹자는 이왕 거기까지 가서 아깝지 않냐고 하지만, 시간도 돈도 없고 귀찮아서도) 비행기를 타기도 한다. 직장인이라면 휴가 또한 하루라도 더 비축하고 싶을 정도로, 오히려 제일 아까운 법이다. 그러다 보면, 아무래도 특별한 연휴 시즌이 아닐 때 주간 5일 근무를 한다면, 금요일 근무를 마치고 최대한 빨리 뜨는 비행기를 타는 편이 최적이다. 아무튼 그렇게 저녁에 서둘러도 공항까지 이동하고 수속하는 시간 등 고려하면 십중팔구 심야 시간에 출발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현지 시각으로 금요일 저녁 연주회는 가기 어렵고, 주말 중에서도 일요일이 아니라 토요일 중 연주회를 가야, 또 빨리 돌아와서 월요일부터 (휴가를 쓰지 않고) 근무를 할 수 있다. 이렇게는 실제로 시도하지 못하고 월요일 하루는 휴가를 써야 하는 시나리오가 많았는데, 장거리 비행기 운항이 어디 그렇게 기차나 버스 시간표 같겠는가. 특히 한국에서 출발할 때는 여러 목적지 가운데 여지를 두고 선택할 수 있으니 그나마 낫지만, 현지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는 유일한 선택이기 때문에 더더욱 일정을 착착 아이들 타임 없이 맞추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휴가를 안 쓰고 주말을 온전히 활용해 장거리 비행을 하고 오면 낭비가 없이 뿌듯한 느낌이 들지 몰라도, 승무원들보다도 빡빡한 단위 비행 경험이니 몸에 무리가 생기고 정상 출근을 해도 실제로는 근무 효율이 오르기 어렵다(생체 시계 및 여타 등등의 이유로)!

아무튼 조금 몸에 무리가 따라도 실연을 못 들을 연주자가 없을 시대에, 필자보다도 연배가 위인 연주자임에도, 또 내한을 안 하는 연주자가 아님에도, 어째 연이 안 닿아서인지 실연을 꼭 듣고 싶은 바람이 아직 이루어지지 못한, 그 주인공 이야기다.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노부유키는 기적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내한 독주회 후기를 공유했지만, 이번에는 근래 내한을 했음에도 가보지 못해서 더 아쉬운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를 나누려 하는데, 기적이라는 이야기는 이런 때 써야 제격이지 싶다.

이름은 당 타이 손. 처음 이 이름을 들었을 때, 분명 서구의 이름은 아니지만, 어느 나라 이름인지 또 딱히 감이 잘 안 잡히기도 했는데, 베트남 출신이다. 이 역시 편견이라면 편견이겠는데, 사실 이 이름을 알게 된 계기는 국제 쇼팽 콩쿠르, 바로 바르샤바에서 (전쟁이나 코로나 등의 전지구적 난세가 아니라면) 5년마다 열리는 최고 권위 대회 중 하나의 우승자라는 범주였기 때문에도, 그 국적이 베트남이라고는 도저히 상상도 더 못했기도 하다. 아니, 베트남보다는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한국에서도 우승은커녕 결선 진출자 한 명을 못 배출하던 그 대회에서 베트남이라니. 모국어로 이 분의 이름을 표기하면 물론 국적은 더 확연해진다: Đặng Thái Sơn.

당 타이 손은 1958년생으로,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해가 1980년이다. 좀 우스운 비교지만 한국은 그로부터 무려 35년 뒤에야 이 대회의 우승자를 배출한다(물론 상위 입상권은 그보다 조금 빠르다.). 1980년 당시 이 대회의 최초 아시아계 우승이다. 그러니까 일본도, 중국도 못 거두고 있던 쾌거인 셈이다. 얼마나 센세이셔널한 충격이었겠는가! 이후 세월이 흘러 현재, 최근 내한 독주회에 다녀오신 분들의 평을 접하니 못 간 게 정말 한이기는 하다. 다음에는 꼭 놓치지 않으리라. 이 연주자를 녹음으로만 접했음에도, 어디 쇼팽 콩쿠르 우승을 아무나 하겠나, 싶게 한마디로, 그야말로 '시적인' 연주를 들려준다. 누가 먼저 붙였는지는 고증을 아직 못했지만, 쇼팽을 두고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하는 이유가 당 타이 손의 연주를 들으면 더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물론 이 별칭은 당 타이 손이 세계 무대에 등장하기보다 훨씬 전에 생겼으니 연주자에 따라 달라지는 꼬리표는 아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쇼팽을 피아노 작품 작곡의 시인이라고, 당 타이 손을 연주 해석의 시인이라고 해야 하려나. 폴란드 출신도 아닌데 이런 쇼팽 연주가 가능하다니? (사실 폴란드 출신들의 쇼팽 연주가 쇼팽답다고 하는 면은 시적인 결보다는 민족적이라고 하는 쪽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도 폴란드 연주자들이 유독 마주르카나 폴로네이즈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향이 크다.) 당 타이 손의 쇼팽 연주를 듣노라면 정말 믿기지 않는, 불가사의한 시가 들리는 듯하다. 이렇게 단조롭게 표현하기에는 무척 아름답고 영감을 부르는 연주인데, 더 말로 표현하다가는 연주의 그런 특성이 오히려 왜곡되어 전달될까 조심스러울 정도다.


어떤 면에서는 당 타이 손의 우승은, 이 어마어마한 대회를 거머쥐었음에도 빛이 바랜 영향으로 화제성에서 뒤로 밀려나기도 해서도 관심권 밖이었는지도 모른다. 당 타이 손의 이 대회 우승 당시, 모스크바에서 같이 공부하던 포고렐리치라는 정말 개성이 강한 피아니스트도 같은 대회에 출전했는데, 포고렐리치에 대한 심사위 평가 결과에 동의하지 못한 이 시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이자 당시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즉각 불만이자 항의의 표시로 대회 중간에 심사위원직을 박차고 바로 다음날 바르샤바를 떠나는 비행기를 탔다는 사건이자 일화가 워낙 불거졌기 때문이다. 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포고렐리치가 이미 당시 이름이 잘 알려진 연주자로서 대회에 출전했지만 개성이 너무 뚜렷한 나머지 콩쿠르에는 잘 안 맞는다는 쪽이어서 그런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반면에, 막상 우승을 차지한 당 타이 손은 무명의, 그저 여러 학생 중 한 명일 뿐이었다. 기적은 바로 여기서부터다. 아무리 피아노의 대국 러시아에서 공부를 했다지만, 워낙 열악한, 게다가 전쟁기의 베트남에서 어려서 자라면서 피아노를 접하고 공부했으므로, 대회 결선에서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협주곡을 연주한 경험이 생애 최초 협연이었다고 했다. 게다가 출전한 대회 또한 그 쇼팽 콩쿠르가 처음이다.

이 정도만으로도 정말 엄청난 사건 중의 사건인데, 이것으로 다가 아니니 정말 놀랍다. 바로 당 타이 손의 우승을 둘러싼 기적의 최고봉은, 당 타이 손의 결선 선곡이다. 유명한 콩쿠르가 다 그러하듯이 결선에서는 협주곡을 연주한다. 쇼팽 콩쿠르는 (작곡가의 이름이 달린 콩쿠르가 다 그렇지는 않다) 이름 그대로 쇼팽의 작품만 연주하는 경연이니, 협주곡 또한 쇼팽이 남긴 두 곡 중 하나를 고르게 된다(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은 물론 더 남겼지만, 'Concerto'라는 작품명으로는 단 둘뿐이다.). 대개 결선에 10명 내외로 진출하는데, 불문율이나 다름 없이 진출자 거의 모두가 1번을 고른다. 그래서 확률이 더 높아서일 수도 있겠지만, 역대 우승자치고 1번 아닌 경우가, 당 타이 손 외에 없거나 한 번 정도로 알려져 있다(너무 옛날 대회인 초기 기록을 찾기가 어려워 불확실한 회차가 더러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1번을 연주했음이 확실하기도 하다.).

그런데, 어디 이처럼 권위가 센 대회가 확률 놀이겠으려고. 1번이 작품번호 11, 2번이 작품번호 21인데, 이 작품번호 내지는 op.로 줄여 쓰는 opus 번호는 작곡 순서가 아니라 악보 출간 순서로 붙는 게 통상적이다. 쇼팽 피아노 협주곡의 경우는 이 두 곡이 실제 작곡 순서와 출간 순서가 뒤바뀐 작품들이다. 어떻게 보면 나중에 작곡한 1번이 여러 면에서 2번보다는 완성도가 높다고 할 수밖에. 작품 특성을 보더라도 확실히 콩쿠르에서는 굳이 둘만 비교할 때는 2번보다는 1번이 더 적합해, 아니 유리해 보이기도 한다. 그 차이란, 정말 초월적인, 또는 비르투오소적인 연주를 들려줄 자신이 없는 한은 2번을 들고 올라가서 1번을 연주하는 무대를 압도하거나 능가하기는 무척 어려운 간극이다. 당 타이 손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2번을 올렸을까? 어쩌면 그 배경은 의외일지도 모르겠지만, 현상으로는 이야말로 당시 대회는 물론 쇼팽 콩쿠르 역사를 통틀어서도 최고 기적이다. 어떻게 보면, 2번으로 우승할 만큼 훌륭한 연주를 한다면, 1번에 대한 미련이 싹 가실 수는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이후로도, 기적은 멈추지 않는다. 세월이 흐르면서 당 타이 손은 교육자로서 훌륭한 제자들도 많이 배출하게 되고, 이윽고 자신이 우승하고 나서 41년 뒤(5년마다 열리는 대회니까 원래는 5로 나누어 떨어지는 40년이어야 하지만, 이후 세계 대전급 사건은 없었고 코로나 사태로 1년 더 늦게 개최되었다) 같은 대회 우승자가 제자 중에 탄생한다.

당 타이 손은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연주자와 교육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을까? 피아노 교수인 어머니 슬하에서 피아노를 처음 배우고 자랐는데, 어머니의 열정 또한 대단했다고 알려졌다. 전쟁통에도 피아노만큼은 절대 놓지 않았다고 하니. 전쟁이라니, 시절로 보면, 한국의 본격적인 피아니스트 1세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전쟁 당시 역시 어린 시절을 보낸 피아니스트 한동일의 모습이 오버랩되고는 한다(한국 연주자들의 이야기와 경험기는 나중에 따로 묶어서 풀어보겠다.).

당 타이 손이 대단한 부분은, 어쩌면 고단하기도 화려하기도 했던 이력을 넘어, 여전히도 연주를 새로 선보일 때마다 늘 더 좋아지고 있다는 점이리라.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성장 경로를 거쳤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스스로 이제는 누군가의 훌륭한 지도자로 활동하지만, 당연히 그 못지 않게 자신도 훌륭한 지도자들을 만난 영향도 크리라. 개인 스스로 기울이는 노력이야 가장 기본이겠지만, 이러한 수고의 레버리지를 극대화하는 역할은 교육자의 몫이니까.

그렇다면, 어떠한 교육자여야 한단 말일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서도 소수겠지만, 유독 제자 또는 자녀 다수를 훌륭하게 성장시키는 대표적 인물들을 어느 분야에서든 만나볼 수 있다. 국내 피아노계에도 제자 양성 면에서는 둘째 간다고 하면 말이 안 될 분들이 더러 계시다.

어떠한 학술적 근거 내지는 인과관계의 명료한 규명 없이, 경험만으로 일반화하기는 어렵겠지만, 여러 관찰기를 종합해보면, 후학, 후세대에 크게 영향을 미쳐 이들이 탁월하게 성장하는 밑거름을 제공한 스승들의 공통점은, 어쩌면 공통점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유일한 공통점이랄까? 그 까닭은, 제자마다 각기 다른 개성과 잠재력을 최대한 이끌어내고 발휘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원론적 성공 이유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세부적 방법론은 스승 각자가 또 다르기 마련일 수도 있다.

어쩌면 특별한 방법론이나 비결보다도 스스로 (새로운) 본이 되는 자체로 충분할지도 모르겠다. 음악계가 아니더라도, 이공계 역시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극단적인 예로 우리나라 수학계를 보면, 비슷한 기적적 역사를 발견할 수 있는데, 리임학(이임학) 교수가, 그리고 임덕상 교수가 공히 태평양을 건너 유학한 뒤 2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은 기록이 연이어진다. 오늘날과 달리 당시에는 학문의 세분화가 심하지 않아 학위 기간이 평균적으로 짧지 않았겠느냐는 해석이 제법 강력하게 치고 나올 법도 한데, 어디 수학이라는 분야가 불과 몇 십 년 사이 학계 분위기가 쉽게 바뀔 수 있던가, 그러니까 당시로도 획기적으로 짧은 기간이었다(물론 학위 과정을 무조건 빨리 마치는 게 능사라는 의미는 아니다.). 유학 전 임덕상 교수는 서울대에서 리임학 교수한테 가르침을 받았다. 모종의 영향 관계 여부 등을 증명하는 수준으로 밝히기는 어렵겠지만, 기록적인 성과 앞에서 교육과 훈련에 관한 충분히 일관된 가설을 세워볼 수 있지 않을까?

끊임없는 성장이라는 열매를 위해서는, 다름이 아니라, 교육자로서는 각 제자의 고유성과 탁월함을 발견하고 그대로 수용하고 신뢰하는 것, 그리고 조금 더 보탠다면, 상상력을 자극하는 정도면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니겠나? 그렇다면, 당 타이 손의 더없이 시적인 연주의 완성도에 얽힌 과거와 현재, 미래를 곱씹어보면서, 새로운 발견을 하기보다는 (실천은 어려운) 만고의 진리를 새삼 재확인한 셈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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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소스: 블랙홀을 source로 삼으면 반타블랙만큼 진한 맛의 과학문화적 sauce가 나온다고 믿는 물리 커뮤니케이터. 과학이라는 표현의 광범위함을 아우를 수는 없어서, 그리고 물리 중에서도 전공한 단편적 영역 외에는 잘 몰라서 최소한의 타협안으로 물리 커뮤니케이터라 자칭. 세상만사의 근간이 얽혀 있다고 믿는 양자중력과 양자정보에 관한 영원한 탐구생활을 위한 밥값은 모 대기업에서 만드는 데이터의, 데이터에 의한, 데이터를 위한 연구로 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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