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 소개] 네나(한상아)를 소개합니다. : 사단법인 아디 | 아카이브 (2024)

[인턴 소개] 네나(한상아)를 소개합니다. : 사단법인 아디 | 아카이브 (1)

밖에서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향하던 길이었습니다. 어느 할아버지께서 길을 물으려는 듯 머뭇거리시더니 결국 묻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셨습니다.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네나는 두리번거리는 할아버지를 향해 지체없이 다가갔고, 무엇이 필요하신지 묻고는 친절히 경로를 안내했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데, 적어도 저로서는 앞으로 네나라는 사람을 기억할 때 그 장면을 떠올리겠구나라는 확신이 들었답니다.

네나와 이야기하다 보면 네나가 믿고 있는 것, 그리고 네나가 꿈꾸는 세상에 ‘힘’이 느껴집니다. 단호함과 부드러움이 공존하고, 자기 확신과 겸손함이 조화를 이룹니다. ‘내일을 포함한 미래를 마음껏 꿈꾸는 세상’, 네나가 해석한 평화를 두고 걸어갈 네나의 걸음걸음이 무척 기대되는 바입니다.

아디에서 2023년 상반기 KOICA YP 인턴으로 활동하고 있는 네나(한상아)를 소개합니다.

# 상아, 네나Naina, 샤론Sha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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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키워드로 자신을 소개해 주세요.

‘상아, 네나, 샤론’, 사실 셋 다 제 이름이에요. 저는 이 세 가지 이름을 기본적으로 엄청나게 좋아하거든요. 요즘에도 이 세 가지 이름을 잘 활용하고 있고 쓰는 빈도도 높아요. 사실 이름에 따라 소통하고 감정을 나누는 대상이 조금씩 달라져요.

어떤 때 각각의 이름들을 활용하시는지 궁금해요.

상아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연인이나 가족들이 불러주는 이름인데, 가장 기본적인 이름이고 그래서 자체로 엄청 소중한 이름이에요. 네나라는 이름은, 제가 인도학과를 나왔거든요. 힌디어 이름인데, 그래서인지 인도와 관련된 사람들이 많이 불러주고 있고, 이곳 아디에서도 네나라고 불리고 있어요. 샤론은 영어 이름이에요. 요즘 일주일에 한 번씩 영어 수업을 받는데 거기서는 저를 샤론이라고 부르거든요. 아마 거기 계신 분들은 제 본명을 모를 수도 있어요. 어떤 때는 그런 게 더 좋기도 하더라고요.

불리는 이름에 따라 조금씩 다른 네나를 상상해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네나는 어떤 뜻인가요?

힌디어로 ‘예쁜 눈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인데요. 저는 개발협력 업계에서 계속 일을 하고 싶고, 이 이름으로 활동명을 쓸 계획이에요. 네나라는 이름이 흔하지 않잖아요. 최소한 저와 함께 일했던 사람은 ‘네나’라는 이름을 통해 저를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 인도학과, 난민, 여성과 아동

아디에 오기까지의 얘기를 여쭤보고 싶어요. 전공이 인도학과라도고 말씀해 주셨는데, 사실 제 주변에 전공이 인도학과 친구가 없거든요.

저는 항상 언어에 자신이 있었어요. 그래서 한국외국어대학교(이하 한국외대)에 가고 싶었고요. 한국외대가 기본적으로 언어를 공부하는 학교잖아요. ‘인도학과’를 선택했던 건, 제가 입시를 하던 2015년만 하더라도 인도를 ‘블루오션’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많은 나라 중 ‘인도’를 선택하게 된 거죠.

대학교 1학년부터 힌디어도 배우고, 지역학도 배웠어요. 그러다 4학년 마지막 학기에 굿네이버스에서 하는 대외 활동이 있었어요.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던 건데, 그걸 하게 되면서 개발협력이라는 분야를 처음 알게 된 거죠. 비교적 시작이 늦긴 했지만 제대로 해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대학에서 배운 남아시아 지역학과 개발 협력을 콜라보하여 동대학원에 진학했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게 된 거죠.

대학원 두 번째 학기에 피난처라는 국제 난민 지원단체에서 인턴십을 하게 됐어요. 국내에서는 난민을 만날 기회가 없잖아요. 그런데 피난처의 최대 장점이 매일 난민을 만날 수 있다는 거였거든요. 난민에 꽂히게 된 거죠. 그때의 만남들 덕분에 ‘난민’, 그중에서도 ‘여성’과 ‘아동’을 내 업의 키워드로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이유로 대학원에서도 로힝야 난민으로 논문을 쓰게 된 거고요.

결국 ‘로힝야 난민’이라는 키워드로 아디에 오시게 된 거군요.

맞아요. 대학원 졸업과 동시에 공백 없이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때마침 아디에서 ‘로힝야 담당 YP(KOICA에서 운영하는 기관 매칭 인턴제)를 뽑더라고요. ‘이건 누가 봐도 내 거다!’(웃음) 자신 있게 지원했고 그렇게 붙어서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된 거죠.

이 일을 계속해야겠다고 다짐한 순간들이 있었을까요?

피난처에서 근무할 당시 매일매일 한국에 거주하는 난민, 그러니까 미등록 체류자라고 하죠. 난민 신청자분들을 직접 만나면서 본국에서의 박해 사유에 대해 들을 기회가 많았어요.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당연히 난민 인정이 되어야 할 분들인데 왜 안 되나’ 싶더라고요.

기억에 남는 모자(母子)가 있었어요. 우간다에서 온 분이었는데, 사실 우간다 정치 상황이 좋지 않거든요. 우간다 군인에게 강간당해서 에이즈에 걸렸고, 그렇게 위험에 노출된 삶이 지속되다 보니 한국으로 피난을 오게 되신 거예요. 한국에 와서도 원치 않는 임신을 하여 아이를 출산하게 됐는데, 엄마가 HIV 보균자이니 아이도 당연히 HIV 바이러스를 갖고 태어나잖아요. 그분이 아이 걱정을 많이 하시던 게 생각나요.

대한민국 법무부에서는 난민 인정을 받고 싶으면 군인에 의해 강간당한 사실을 증명하라고 해요. 그런데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어요. 인터뷰하면서 저도 많이 울고 그분도 많이 울고, 그랬죠.

직접적인 관계가 생기면서 인도주의적 활동을 지속해야겠다는 동기를 얻으셨나 봐요.

난민 인정만 받으면 정부로부터 정식으로 보호받을 수 있어요.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있고, 기초 교육도 받을 수 있고, 합법적으로 일도 할 수 있죠.

이 일을 하며 네나가 품고 있는 믿음이나 신념 같은 것도 있을까요?

개인적인 믿음이긴 한데요. 첫 번째는 나에게 큰 애정이 없는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는 것, 두 번째는 나 또한 언제나 틀릴 수 있다는 마음을 갖는 것. 이 두 가지를 항상 마음에 새기며 살아요.

# 로힝야, 평화, 일상의 행복

아디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지 궁금해요.

저희 팀은 방글라데시 현지 파견팀이 있는데요. 저는 주로 파견팀과 한국 지부를 잇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동시에 아디가 현장에서 하는 활동을 한국 사회에 홍보하는 역할도 하고 있고요. 대표적으로 ‘로힝야 토크쇼’ 같은 게 있죠.

아디에서 일을 하며 로힝야 난민에 대한 관심도가 더 커지셨나요?

관심도는 처음부터 너무 컸기 때문에 더 이상 커질 관심도는 없었던 것 같고요. 다만 정답에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었던 건 있었어요. 작년에 로힝야 난민을 연구하면서도 엄청 답답했던 부분은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였거든요. ‘본국으로 송환할 거냐’ 아니면 ‘방글라데시 정부에서 로힝야 난민에게 합법적인 난민 지위를 줄 거냐’ 제대로 된 논의 없이 임시방편으로 세워진 난민 캠프에서 로힝야 난민들이 5세대, 6세대 살도록 하는 게 너무 답답했어요.

심지어 제가 일하는 동안 로힝야 난민캠프 상황은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있어요. 하루에 3개씩 나눠주던 빵을 하나씩만 주고요. 사실 제가 원하는 건 하나거든요. 이 일을 안 해도 좋으니 이 세상에 난민들이 없어지는 거요.

네나가 생각하는 ‘평화’는 어떤 상태인가요?

제가 만났던 난민 중 한 분이 떠오르는데요. 한국에서 지냈던 6년 동안 단 한 번도 먹고 싶은 음식을 먹었던 적이 없다는 거예요. 난민분과 둘이 길을 걷다가 들은 건데, 너무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나요. 왜냐하면 저는 그날도 제가 먹고 싶었던 피자를 점심으로 먹었거든요. 우리는 선택의 기회가 많을 때, 어쩌면 아주 사소한 영역이지만 의식주를 해결했을 때 행복함을 느끼잖아요. 반대로 일상에서 사소한 것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때 쉽게 박탈감을 느끼는 걸 거고요.

어떠한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견디는 상태라면, 무력감에 지배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임시 체류를 하시는 분들은 여전히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하고 계세요. 그렇다고 일을 하실 수 있는 상태도 아니거든요. 그나마 어떻게든 연결된 일자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안전한 일도 아니에요. 1차원적인 일들이죠. 그마저도 경찰에 잡히면 바로 강제 송환되거나 보호소에 수감되는 거고요. 그러니까 일을 하면서도 노심초사하면서 일을 하는 거거든요. 평화가 뭔지는 몰라도 그런 삶을 평화라고 말할 수 없는 건 확실히 알 것 같아요.

그러니까, 평화는 당장 내일을 포함한 미래를 마음껏 그리고 꿈꿀 수 있는 세상이 아닐까 싶어요. 어떠한 외부적인 제약 없이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세상, 그런 게 평화로운 세상이겠죠.

# 무엇이 되었던 난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서

아디에서의 시간은 어떤 시간이라고 생각하세요?

난민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는 저의 꿈을 더 단단히 만들어줬던 시간이었어요. 아디는 타인의 불행을 내 일처럼 공감하며 내 일처럼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함께하기 좋은 곳 같아요.

아디의 시간을 딛고 이어갈 네나의 다음 스텝을 들려주세요.

저는 난민 분야를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들을 직접 관계자가 되어 경험해 보고 싶어요. 가장 가까운 미래로는 유엔난민기구, 즉 UNHCR에서 근무해 보는 것이 꿈이에요. 다들 아실 거로 생각하는데, 난민 이슈에서 가장 상위기구인 만큼 권한도 클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프로젝트 규모도 크고 재정도 크니깐 난민 이슈를 훨씬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권한이 있다는 건 변화를 유도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도 통하니까요. 10년 뒤 네나를 상상해 본 적 있으신가요?

그렇죠. 10년 뒤면 37살이더라고요. 그때쯤이면 가정도 꾸렸을 거고 아이를 낳아 엄마의 삶도 경험해 보고 싶고, 커리어적으로는 한 팀의 리더이고 싶어요. 무엇이 되었던 난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서 지내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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